신새벽이 될 때까지 정문의 작은 방에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매서운 겨울 바람은 허술하게 창틀에 끼워맞춰진 얇은 유리창을 부술 듯이 때려댔고, 흔들리는 창틈으로는 칼날처럼 매서운 동장군의 한기가 비집고 들어와 방 안을 제 맘껏 휘돌았다. 가운데에 정문이 있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워 시선만 앉은뱅이 책상에 고정한 정문은 느리지만 빠르게 원고지의 칸을 채워가고 있었다. 단정한 글씨 하나하나가 흔들림 없이 종이 위에 몸을 누일 , 이번에는 겨우 걸쇠 하나로 잠궈두었던 문이 덜컹, 하고 제법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정문은 마치 일상적인 것마냥 글을 써내려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겨울이면 으레 들려오는 친숙한 소음이었다. 오히려 연필심과 원고지가 부딛치는 소리 이외에는 너무도 조용한, 작은 칸의 정적을 깨트리는 고마운 소리이기도 했다. 이렇게 번을 덜컹거리면 바람도 멎고, 덜컹이는 수를 머릿속으로 헤아리면 밖에는 해가 날이 밝아오리라.

 

 아직 어둠이 내려앉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창밖을 잠시 곁눈질하던 정문의 뒤로 다시 문이 덜컹였다. 덜컹, , . 정문이 연필을 내려두었다. 문을 때리는 것은 바람이 아니었다. 미묘하게 다른 무게에 정문이 느릿하게 몸을 반쯤 돌려 현관을 바라보았다. , 한번 문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소리는 잠잠해졌으나 주변에 제법 예민했던 정문은 밖에 아무도 없는 기척을 죽이고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나을까 생각했지만, 맞물리지 못해 바람이 새어드는 문틈으로 들려오는 희미한 숨소리는 온전한 이의 것이라기엔 꽤나 가쁘고 힘겨웠다. 누가 시간에 저를 찾았는지 기억을 더듬어도 길이 없어 정문은 잠시 고민하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걸음을 걸어 문짝의 잠금을 풀었다.

 

  것인가, 잠시 고민하던 정문은 밀려들 바람에 잠시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새벽 공기에 얼어버린 냉기가 뺨을 때리듯 매섭게 정문을 휘돌았고 잠시 눈을 가늘게 그는 소리의 근원을 찾듯 시선을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금 거칠은 숨소리가 들렸을 , 그는 작은 쪽방의 바깥벽에 기대어 앉은 남자를 보았다. 고개를 숙인 탓에 보이는 것은 짧은 머리뿐이었으나, 틀어쥔 옆구리와 셔츠에 검게 배어나온 핏물,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그의 대부분을 설명하고 있었다. 제법 귀찮게 되었고, 다른 의미로 난감하게 되었다. 문을 닫지도 그를 부르지도 못한 가만히 문고리를 붙잡고 있던 정문을 향해 남자가 삐걱이며 고개를 들었다. 와중에도 찡그리듯 웃으며 정문에게 말을 걸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정문은 대답 대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찰을 돌러 테다. 여러모로 곤란해지느니 무어라도 일단은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싶어 정문은 따뜻하진 못한 손을 그를 향해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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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행로

정태수 x 이정문

w. 준희

 

 

 

 지겹게도 비가 쏟아졌다. 지치지도 않을 끝없이 쏟아지는 비를, 정태수는 우두커니 성당 공터에 서서 끈질기게도 맞고만 있었다. 경감도, 오구탁도, 박웅철도 저마다의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운 성당에는 정문 자신밖에 없었다. 언제나처럼 번째 가운뎃자리에 앉아 정면만을 응시하던 정문이 눈을 감고 창문을 거세게 때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혀를 내두를 만큼 거센 폭우였다. 그리고 안에 정태수가 있었다. 그가 신경을 쓰던 여자, 그리고 그녀의 아이가 결국 죽었다고 했다. 정태수와 대치하던 누군가의 소행이라고 했던가. 사건은 싱거우리만치 일찍 종결되었으나 그에게 가해진 충격은 적지 않은 듯싶었다. 여전히 빗줄기는 잦아들 생각을 않는다. 잠시 고민하던 정문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 서서 뿌옇게 흐린 창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던 장우산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잠시 그대로 입구를 바라보았다. 단순히 문을 열고 나가 우산을 씌워주는 문제가 아니었다. 여러가지 생각이 빗소리와 함께 어지러이 머리를 휘돌고 지나갔다. 하지만 생각이 무엇인지 수가 없어 정문은 혼란스러웠다. 우산 손잡이를 고쳐쥐고 가벼운 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는 걸음을 옮겼고, 천천히 손을 뻗어 입구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힘을 주어 당기려 , 먼저 문이 열렸다. 빗소리가 순간 귓가에 크게 들려왔다. 문을 것은 새하얗게 질린 비에 젖은 태수였다. 정문이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태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감정마저 빗물에 씻겨나간 빗물에 젖었는데도 건조한 표정이었다. 태수의 시선 역시 정문을 향했다. 한동안 둘이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마주했다.


 먼저 손을 뻗은 것은 정문이었다. 아주 느리고, 천천히, 그의 눈가에 맺혀 있던 빗물을 끝으로 쓸어냈다.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태수가 입을 달싹이다 결국 다물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향해 뻗었던 정문의 손목을 붙잡았다. 놀란 기색은 없었다. 그저 잠시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그를 마주했을 뿐이다. 어느 누구도, 누구 하나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남아있던 물기가 천천히 얼굴선을 타고 흘러 바닥에 , 하는 소리와 함께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소리를 기점으로 태수가 정문의 손목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어 그를 쪽으로 당겼다. 잠시 멈칫하던 정문이 두어 발짝 그가 끄는 대로 이끌렸다. 시선의 거리가 좁혀지고, 얼굴이 가까워진다. 여전히 어느 누구도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싸이코.”


 싸이코. 더할나위 없이 그에게 어울리는 호칭이었다. 어느새 이름 대신 저도 모르게 튀어나갈 만큼 익숙해져 있기도 했다. 언젠가 아무도 없는 성당 안에서 낮게 중얼거렸으나 천장이 높아 귓가에 유독 크게 울린 적이 있었다. 태수는 그때 그의 이름이, 조금, 사람을 간지럽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몰랐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그와 시선을 마주한 지금 그는 이상하게도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열어도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울컥이며 없는 감정의 덩어리만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같았다. 결국 태수는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말았다. 하지만 여전히 정문의 표정은 건조했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헛웃음을 지으며 태수가 결국 목소리를 짜내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정문.

“…… 이정문……”


 다시금 불렀다. 쥐어짜듯 가늘게, 조심스레. 그리고 순간 정문의 시선이 일렁였다. 표정은 분명 그대로였으나 계속하여 시선을 마주하던 태수는 알아챌 있었다. 아주 작은 파문, 그것은 없는 감정의 기폭제와도 같았으며, 도화선의 일종인 것도 같았다. 눈을 깜박인 정문이 그대로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잡힌 손목은 단단히 그를 붙잡고 있었으며, 오히려 반동처럼 글을 끌어당겼다. 결국 정문의 손에서 우산이 떨어졌다. 비어있던 태수의 반대쪽 손이 정문의 뒷덜미를 손으로 감싸 당겼다. 급속도로 가까워진 얼굴은 맞닿는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놀란 정문이 눈을 크게 떴으나 밀쳐내기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차게 식은 입술이, 의외로 온기를 가진 건조한 입술과 포개지며 미약한 열기를 퍼트려냈다. 이성을 유지하는 것마저도 힘들어 포기한 자에게 남은 것은 본능뿐이었다. 본능이 표출되는 목적지는 태수 본인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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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자꾸만 엇나가는 감정을 추스를 수 없었다. 꺼지지 않는 지옥불이 제 심장 한 구석에 피어났고, 독이 든 혀가 목 끝까지 넘실거렸다. 어떻게든 제 자신을 추스르려 이를 악물다 보면 어금니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나 두통이 느껴졌다. 결국 그는 정해진 규칙을 어기고, 분을 이기지 못하고 상대를 그대로 눕혀 주먹을 날렸다. 왜 자신이 그를 때리고 있었는지, 왜 그래선 안됐던 건지에 대한 판단조차 할 수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기 시작했다. 이유 없는 서러움과 서글픔이 혼재되어 억 하고 숨조차 쉬기 힘들어지곤 했다. 도대체 왜? 남자는 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루이틀 해온 일도 아니었다. 그동안 쌓아온 자신의 커리어가 저 스스로의 행동에 의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날카로운 줄에 걸려 제 몸뚱이를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피노키오처럼 남자는 열과 분노, 그리고 찢어질 듯한 예민함을 앓으며 머리를 틀어쥐었다. 그것이 때늦은 각성이라는 사실을 남자는 또다시 늦게 알아차렸다.


 청년은 시간이 지날수록 얼어붙는 감성에 손을 데었다. 절대 영하로 끝없이 곤두박질치는 메마른 감성에 제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다 못해 차가운 화상을 입었다. 심장 한 구석부터 맺힌 얼음조각에 목 안이 막혀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청년은 그럴 때마다 눈을 감았다. 언제나 당연스레 쥐고 있던 노란색 스테들러 연필이 마치 쓸모없는 막대기처럼 느껴졌다. 언제부터 그것으로 글자를 적어내렸는지, 어떻게 글자를 원고지 위에 새겼는지, 글자는 어떻게 적는 거였는지, 나는 무엇을 위해 글자라는 것을 써 왔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세밀한 감정의 조각이 무뎌져 쓸모없는 강가의 돌멩이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손을 쥐려 했지만 그조차도 한 박자 느렸다. 천천히 얼어붙어 느리게 금이 가는 얼음 조각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헛헛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청년은 본디 그런 사람이었기에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그가 살아가기 위한 유일한 목숨줄이었던 글이 점점 자신과 멀어져가는 것을 깨닫자 청년은 괴로움을 느꼈다. 제 목에 둥글게 걸린 목숨줄이 멀어지면서 오히려 제 목을 옥죄어 숨통을 조였다. 그것은 제 모든 감정을 원고지 위에 쏟아낸 그가 바닥에서 찾아낸 늦은 각성이었다.




S y n c h r o n i z a t i o n

정태수 & 이정문

준희



D A Y  1


태수는 희뿌연 숨을 뱉어내며 구청 건물을 눈으로 살폈다. 젠장, 이걸 꼭 해야 하나. 그리고 입 안으로 작게 중얼이며 한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다 본다. 파트너 신청 확인 서류. 공인 섹스 파트너를 찾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헛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 번 서류를 구겨버릴까 하고 고민했지만 이내 다시 종이를 탈탈 터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크게 숨을 한 번 내쉰 뒤, 셔츠와 정장 자켓의 매무새를 정리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니까, 어젯밤 전화가 왔다. 정태수 씨 파트너로 적합한 분과 연락이 닿았으니 내일 아침 열한 시까지 구청으로 오시라고. 그 적합한 분이라면 분명 저와 정 반대인 LS겠지. 서류에 적힌 주의사항, 그리고 매뉴얼에는 PS와 LS가 서로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 그리고 둘 사이의 유의사항 같은 것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활자하고 연 끊은지 얼마나 오래됐는데 뭘 또 읽으라고 난리야. 하지만 제 직업, 나아가 목숨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니 입 안이 텁텁해져 그대로 버릴 수도 없었다. 제엔장. 가지가지 하는군. 제 주변엔 희한하게도 각성을 한 사람이 없었고, 그나마 있다 하더라도 저같은 PS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단 한 번도 LS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본인이 온통 불에 덴 것처럼 몸이 홧홧하니 LS는 정 반대인가. 그렇다면 엄청 추울지도. 실없는 생각과 함께 태수는 구청의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 저… 며칠 전에 그, 파트너 등록을.”

“어머, 정태수 씨 맞으시죠? 파트너분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시계를 흘끗 곁눈질했다. 열한 시 정각이다. 그런데 벌써 기다리고 있다고? 주말인데 참 성실한 사람이네. 아침잠도 없나. 억지로 눈을 떠 여기까지 걸음했던 기억이 떠올라 뒷목을 매만지며 태수는 차트를 든 여직원을 따라 걸었다. 서류 쪼가리는 도통 눈에 들어오질 않아 간밤에 인터넷에서 PS와 LS에 대해 이것저것 검색을 좀 했다. 그러고 보니 파트너들끼리는 서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한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감정을 공유해서 그런 건가. 무슨 스킨쉽 같은 것도 해야 한다고 적혀있던 것 같고. 그렇다면… 뭐, 기왕이면 예쁜 여자가 좋을지도. 여기까지 생각하니 그건 좀 아니다 싶어 가볍게 헛웃음을 지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여직원이 대기실의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태수 역시 문이 닫히기 전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고, 뒤를 돌아 문을 조심히 닫으며 짧게 심호흡을 했다. 등 뒤로 여직원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이정문 씨. 파트너분 오셨어요. 여직원이 방긋방긋 웃으며 뒤를 돌아선 태수를 향해 손을 내민다.


“정태수 씨, 이정문 씨예요. 28세시고, 꽤 유명한 작가신데. 아세요? 바람 부는 거리.”

“아, 예. 그렇습니까.”


그리고 이정문 씨, 정태수 씨예요. 정문 씨보다 네 살 많으신데, 무술감독으로 일하고 계세요. 여직원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태수가 이정문이라 소개받은 이를 가만히 바라본다. 이정문은 남자였다. 동성애에 별다른 차별적 시선을 가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제 친구 중에도 게이 커플이 있다. 하지만 태수 본인은 한 번도 남자를 이성적인 존재로 바라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바로 이 문을 열기 전까지도 파트너와 잘 될 수도 있지 않나, 하고 설레발을 쳤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괜히 한 손으로 주먹을 쥐어 입을 가린 태수가 헛기침을 하며 이정문이라는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희고 멀끔한 얼굴은 나쁘게 말하면 볕도 못 받아본 것처럼 희끄무레했고, 좋게 말하면 어린 여자들이 좋아할 법한 미청년의 인상이었다. 그리고 매우 과묵했다. 대기실 안에 들어온 이래 정문은 그저 여직원의 말에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낯을 가리는 건가 싶어 잠시 난감하게 바라보던 태수는 먼저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이정문 씨.”

“...”


정문이 시선을 들어 태수를 바라보았고, 그제서야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정문은 그를 가만히 바라볼 뿐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거 참,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군. 입 밖으로 꺼내진 않고 속으로 중얼거린 태수는 여직원의 안내에 따라 정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원형 테이블을 둘러싸고 여직원과 이정문, 그리고 태수가 앉아 잠시 침묵을 지켰다. 차트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 넘겨보던 여직원이 이내 한 페이지를 펼쳐 둘의 사이로 밀어두었다. 파트너 계약 동의서. 파트너의 폭주, 결핍으로 인해 범죄가 발생할 경우 상대방에게 연대책임을 묻게 된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태수는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제 액션스쿨의 스턴트맨들을 촬영 소도구보다도 못하게 취급하는 A급 남자배우의 상대를 해주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촬영을 빌미로 흠씬 두들기고 말았다. 촬영장의 모든 사람들이 고깝게 생각하는 배우였기에 감독도 다음부턴 좀 살살 하라며 훈계로 넘어갔지만, 몇 년이나 스턴트맨과 무술감독으로 일해온 태수가 겨우 그런 일에 평정심을 잃고 주먹을 휘두른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태수가 파트너 신청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했다. 그런 일은 언제든, 어디서든 또 일어날 수 있었기에.


“여기 아래, PS 서명란하고 LS 서명란에 이름 적고 싸인 해주시면 돼요.”


 여직원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내렸다. 여전히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따라서 여직원의 손끝을 바라보던 정문이 먼저 펜을 들고 단정하게 이름을 적었다. 이, 정, 문. 그리고 간단한 싸인까지. 언뜻 손끝이 파랗게 물든 것처럼 보여 태수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이윽고 펜을 종이에서 뗀 정문이 그대로 펜을 태수에게 내밀었다. 저도 모르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수가 조금 급하게 펜을 받아들고 그 아래에 제 이름을 적었다. 정문에 비하면 제법 삐뚤한 글씨였다. 글씨 쓰면서 먹고 사는 직업도 아닌데 잘 써서 좋을 게 뭐 있나. 괜히 입맛을 다시며 펜을 내려놓고 뒷목을 매만졌다. 서류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여직원이 차트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연락처 교환하시구요, 이야기 조금 나누셔도 돼요. 밖으로 자리 옮기셔서 이야기 하셔도 되구요. 문의사항 있으면 언제든 다시 구청으로 연락하시구요. 파트너 변경도 불가능하니까 대화 많이 나눠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럼. 사무적으로 말을 끝낸 여직원이 문을 닫고 나간다. 그러자 대기실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후. 한숨인지 심호흡인지 모를 숨을 내뱉으며 태수가 은근슬쩍 정문의 눈치를 살폈다. 거 참, 무슨 말을 못 하겠네. 말이 없어도 이렇게 없는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헛기침을 몇 번 한 태수가 입을 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나름 제 시간에 맞춰서 왔는데. 그러자 정문이 시선을 들어 자신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갤 젓는다. 아침잠이 없어서. 짤막한 목소리, 그것이 태수가 처음으로 들은 목소리였다. 차분하고 낮은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간지러운 목소리라 생각했고, 그와 별개로 목소리에 이유 모를 냉기가 뚝뚝 묻어나는 것 같았다. 아, 하하. 아침잠이 없으시구나. 전 아침잠이 많진 않은데 촬영이 새벽까지 많이 연장되다 보니까 잠을 못 자서 한 번 자면 눈을 잘 못 뜹니다. 태수의 말에 정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대화가 뭉텅이로 끊어지는 느낌이었지만 그는 의외로 오기가 생겼다. 목소리나 한번 더 들어보자는 심산이기도 했고, 여직원이 말한대로 앞으로 파트너 변경도 불가능하니 무엇이든 해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기도 했다.


“이정문 씨, 아침은 먹었어요?”


 정문이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찬찬히 젓는다. 그럼 나가죠. 아직 시간이 애매하니 브런치라도 먹으러 갑시다. 나가서 이야기도 좀 하고. 물론 태수 본인이 카페에 가서 브런치를 먹을만큼 교양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문에게는 어쩐지 그렇게 제의를 해야 할 것 같아서 태수는 제 입으로 말하고도 피식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잠시 고민하던 정문이 예, 그러죠. 하고 겉옷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수 역시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문은 생각보다 키가 컸다. 일어나서 가늠해보니 대충 저보다 많으면 5cm정도, 적으면 3cm정도 차이가 나는 듯했다. 시커먼 남자 둘이서 접촉으로 감정 공유따위를 해야 한다니. 참 웃기는 일이다 싶었지만 정문의 서늘한 옆선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에 대한 호기심이 조금씩 생긴다. 그러고 보니 작가라고 했지. 바람 부는 거리. 저는 읽은 적 없지만 이름이나 대강의 스토리는 알고 있었다. 영화화가 된다는 소문도 돌았더랬다. 제법 서정적이고 담백한 로맨스 소설이라고 들었는데, 이 무뚝뚝한 남자가? 영 매치가 되질 않는다.


 어찌됐든 자세한 이야기는 마주앉아 식사를 하면 뭐라도 들을 수 있겠거니 싶어 그대로 나란히 복도를 걸어 구청 밖으로 나왔다. 11월의 끝자락이라 그런지 숨을 내뱉으면 그대로 하얀 김이 되어 흩어진다. 들어갔다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들어올 때처럼 쌀쌀했다. 곧 눈이 온다는 것도 마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눈이 오면 몸이 더 굼떠지고 액션이 딱딱해지는데. 열심히 해야겠네. 그런 쓰잘데없는 생각을 하며 태수는 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정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역시 한 손으로 다른 손을 매만지며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문의 손끝에는 여전히 새파란 잔상이 남았다. 그만큼 창백한 것인지, 추위를 잘 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면 내 눈이 이상한가. 작게 중얼거리며 몇걸음 더 옮길 때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그대로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한다. 이전에 액션신 연출 방법에 대한 조언을 부탁한다며 컨택했던 프로듀서였다.


“예, 피디님.”

-정 감독님. 지금 지금 바쁘십니까?


 바쁘진 않지만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무슨 일이십니까, 하고 태수가 물으니 총감독님께서 액션신을 정 감독님께 맡기고 싶다고 하셨단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다른 액션 스튜디오는 서에 차지 않을 것 같다고. 새벽까지 회의한 끝에 급하게 결정한 것인데, 해외 로케 일정이 있어서 정식으로 계약을 하려면 지금 당장 오셔서 이야기를 좀 해봐야 할 것 같다는 말에 태수는 당장 가겠다고 덜컥 대답부터 해버렸다. 그럼 지금 스튜디오에서 뵙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으며 고개를 돌린 후에야 옆에 정문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냈다. 정문은 가만히 서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태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이런. 바로 옆에서 지금 가겠다고 말까지 해버렸으니 무어라 둘러댈 수도 없을 터였다. 그게 말입니다, 하고 더듬더듬 입을 열자니 정문이 태수를 가볍게 눈짓한다.


“바빠 보이시는데. 가세요.”

“예? 아, 그게. 갑자기 급하게 걸려온 거라. 예.”


 미안합니다, 정문 씨. 멋쩍음에 조금 더 그에게 살갑게 말을 걸자 정문이 시선을 잠시 바닥으로 내렸다가 들어 태수를 바라본다. 참 리액션 없다. 미안한 와중에도 그런 정문이 신기해 태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핸드폰으로 시계를 확인한 뒤 나중에 봅시다, 오늘은 미안하니까 내가 밥이라도 살게요. 하고 다시금 먼저 말을 건다. 그러다 아- 하고 무언가 생각난 듯 대뜸 정문에게 제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리고 정문은 그런 태수를 향해 드물게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번호를 알아야 연락을 하죠.”


하고 태수가 픽 웃으며 다시금 그 쪽으로 핸드폰을 내민다. 아. 그제서야 반 박자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정문이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꺼내어 핸드폰을 잡았다. 손끝이 스치는 건 제법 당연하고,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정문의 손은 계속해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던 사람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차가웠다. 언뜻 스쳤던 창백한 푸른색이 그대로 손끝에서 촉각으로 드러난 것 같았다. 태수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지만 정문은 개의치 않는 듯 잠시 멈추었다가 그대로 핸드폰을 받아들어 제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그대로 다시 핸드폰을 내밀었다. 받아가라는 듯. 그리고 정문이 그랬듯 태수 역시 핸드폰을 다시 잡고, 미세하게 다시 손끝이 스쳤다. 역시 서늘하다. 그리고 묘하게 찌릿했다.


“오늘은 언제 끝날지 모르니, 내일 연락 드리겠습니다. 나중에 보죠, 정문 씨.”


 번호가 저장된 것을 확인한 태수가 그를 향해 목인사를 한 후 뒤돌아 주차장에 주차해둔 제 차 쪽으로 걸었다. 이윽고 그의 차가 조금 빠르게 구청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다시 자켓 주머니에 손을 밀어넣고 그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던 정문이, 그의 검정색 에쿠스가 멀어질 때까지 가만히 서서 바라보다 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몇 번의 느린 터치 끝에 전화번호부에 들어갔다. 최근 추가 목록에 정태수, 라는 이름 세 글자가 있었다. 여직원이 그에게 미리 알려준 번호였다. 단조롭기 그지없는 열한 자리 번호를 가만히 눈에 담던 정문이 이내 다시 홀드를 걸고 핸드폰과 손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태수가 빠져나간 길을 따라 거리로 나섰다. 추운 바람이 부는 사이에 언뜻 스쳤던 손 끝에 조금이나마 냉기가 가신 듯 해 정문은 주머니 속에서 손을 잠시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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